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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은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끌고갈 수 있었나 - 노예 무역의 비화 유럽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대표적인 노예 무역인 삼각 무역>

15세기, 포르투갈의 항해자들이 최초로 아프리카 서해안에 상륙한 이래 서구 유럽인들에 의한 노예 무역의
암울한 역사는 1863년 미국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이 되기까지 무려 수백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노예 해방 선언 이후에도 19c까지 이에 반발하는 미국 남부 주 일대에선 여전히 비밀리에 노예 무역과
비인간적인 노예에 대한 혹사가 이루어졌고, 이는 결국 남북전쟁으로 치닫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필자가 늘 궁금해했던 질문이 있다.

'아프리카 인들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잡혀 아메리카로 팔려 갔는데, 어떻게 소수의 유럽, 백인이
그 많은 아프리카 인들을 통제할 수 있었는가?'

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끔찍한 노예 무역의 흔적, 아메리카로 가던 노예선>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선 먼저, 수 세기 동안 행해진 이러한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노예 무역의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파악이 필요하다.
SpainPortugalGreat BritainNetherlandsU.S.A.FranceDenmark
1,061,5245,848,2663,259,441554,336305,3261,381,404111,040
표1. <Emory 대학의 Henry Louis Gates Jr. 교수가 추정한 노예의 수.
포르투갈의 숫자가 압도적이다.>

<도표1. >

<관련한 표와 도표를 보면 대략적으로 1200만에서 1300만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사람'이 노예로 팔려갔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자료를 보면 일단 우리는 여기서 유럽인들을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유럽인의 노예무역은 두고두고 아프리카 국가들과 피해자들에게 사죄, 배상해야 할 책임이 있는 범죄였다.
그러나, 앞서 했던 질문처럼 '과연 천수백만 명이나 되는 이 엄청난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유럽인들에 의해
끌려갔을 수 있단 말인가?'
'유럽인들의 무기와 대포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과연 아프리카 인들이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던 것일까?'

하는 질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몇 가지 흥미롭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또다른 고민거리를 안겨 주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유럽인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서아프리카 지역의 여러 지역 사회에서,
부족마다 다른 다양한 형태의 노예 제도가 존재했다"2)

<1743년 서아프리카의 지도>

File

<노예 무역이 이루어졌던 서아프리카의 지역들>


<카메룬의 노예,
old woman slave owned by Queen Mother Njapundunke, mother of the Bamum king Njoya
(Njoya 왕의 어머니 Njapundunke 대비 소유)>

이 사진은 무려 '1915년'에 촬영된 사진이다. 
이 때까지도 서아프리카에선 유력자들이 소유한 노예가 시스템으로 남아있던 것이다.
Date created: 1911/1915
3)

이처럼 '현지 유력자'들, 인간 세상이라면 어디든 존재하는 '지배자(소유자)'와 '피지배자(노예)'의 관계에 의해,
서아프리카에서도 '유력자'에 의한 노예들이 양산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노예가 된 자들은 현지 유력자에 의해 '유럽인'들에게 팔려나갔던 것이었다.
유력자들은 유럽인들에게 노예를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이득을 얻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되는 사항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지배자'들은 아프리카의 그 현지인들을 어떻게 노예로 만들었던 것일까?


<현지 부족장, 혹은 왕의 행사에 동원된 '노예들'>
서양학계, 유럽과 미국 쪽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아프리카 노예 제도의 종류는 다양하여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 채무노예, 무역을 위한 노예, 가사를 대신 해주는 노예' 등 다양한 형태로 존속했다고 한다.

Khasso(Xaaso)

동쪽의 밤바라 제국처럼, 카소 왕국은 경제를 위해 노예 무역에 크게 의존했다. 가족의 지위는 그들이 소유한 노예의 수에 의해 표시되었고, 더 많은 포로들을 데려가는 유일한 목적을 위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무역으로 인해 카소 족은 아프리카 서부 해안의 유럽 정착지들, 특히 프랑스와 접촉하게 되었다.Les chefs du Khasso vont se faire essentiellement la guerre non seulement pour se défendre mais pour s’emparer de nombreux esclaves. La richesse au Khasso se mesurait en nombre d’esclaves que les rois et leurs alliés pouvaient posséder. 8)


File
<현 가나 공화국에 위치해 있던 아샨티 왕국Ashante Kingdom>

아샨티 왕국의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아샨티 왕국에도 노예 제도가 있었는데 그 노예들은 주로
전쟁 포로, 즉 다른 부족이나 왕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전사들이나 부족을 노예로 삼은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노예 제도와는 달리 아샨티의 노예들은 주인의 가족과 함께 재산을 쌓고 결혼 할 수 있는 것에서 부터 장례식에서 희생되는 것까지 다양했다고 한다 . 아샨티 왕국의 노예는 때때로 다른 노예를 소유 할 수 있었으며, 노예가 심각하게 학대를 당했다고 믿는 경우 새 주인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4)

이렇게 전근대 시절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던 바로 그 노예 제도가 아프리카에도 존재한 것이다. 
그리고 그 노예들은 우리가 아는 미국의 그 노예들처럼 혹사 당하기 보단 주인의 집에서 먹고 자고 주인의 일을
도우며, 소유물이긴 하지만 죽을 때까지 시달리며 기계처럼 일만 하는 그런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도착한 후에는 상황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같은 흑인들을 납치하여 유럽인들에게 비싼 값에 팔아넘기려는' 노예 판매로 부를 쌓으려는 지배자들이 등장해버린 것이다.

대서양 노예 무역은 18세기 후반에 정점에 달했는데, 그 때 서아프리카 내륙으로의 침략으로 가장 많은 수의 노예들이 붙잡혔다. 유럽의 식민 지배력이 신대륙으로 확대됨에 따라 노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게 되고, 노예 무역은 서아프리카 열강들에게 훨씬 더 수지맞는 장사가 되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서아프리카 제국들이 노예 무역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오요 제국(요루바), 공 제국, 후타 잘론 이맘국(Imamate), 후타 토로 이맘국, 코야 왕국, 카아부 왕국, 판테 남부 연합, 아샨티 남부 연합, 다호메이 왕국이 포함되었다. 이들 왕국은 유럽과의 교역에 필요한 수많은 인간 포로를 탄생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전쟁의 군국주의적 문화에 의존했다. 5)
Dahomey Kingdom의 국기 

<다호메이의 국기와 현 베냉 공화국에 위치했던 다호메이 왕국>

File

<다호메이의 왕, Gezo>

File
미국 앨라배마주 모빌Mobile의 항구까지 항해한 것으로 알려진 마지막 노예선은 국제 노예 무역이 폐지된 지 한참 후에 구입한 다호메이 왕국의 110명의 노예들을 데려왔다. 토마스 제퍼슨은 1808년 1월 1일 발효된 3월 2일 노예의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1860년 7월 9일, 윌리엄 포스터에 의해 납치된 클로틸다라는 이름의 스쿠너가 다호메이 왕국에서 미국으로의 마지막 노예 수송으로 알려진 항해를 위해 모빌에 도착했다. 1858년 티모시 마이어(Timothy Meaher)로 알려진 한 남자는 노예 거래를 금지하는 법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안전하게 데려올 수 있다고 지인들과 내기를 했다. 1894년, 다호메이의 마지막 왕 베한진Béhanzin은 알프레드 아메데 도드에게 항복했다. 윌리엄 포스터 대위는 1860년 그가 어떻게 노예들을 소유하게 되었는지를 기술하면서 "그 때부터 나는 다호메이 왕을 만나러 갔다. 태자와 기분 좋게 일을 처리한 후, 우리는 그들이 4천명의 포로를 감금하고 있던 창고에 가서..중략..그들을 억류하고, 흑인 화물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그 노예들을 배에 아주 단단히 고정시켰다." 6)
유럽인과 미국인, 백인들은 이렇게 현지의 유력자로부터 '노예들을 대량으로 구매'함으로써
그 수 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 아메리카로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들의 '고객'들의 요청에 따라, 고객이 거주하거나 고객의 농장이 있던
미국 남부나 카리브 해 섬들의 플랜테이션 사탕수수 농장으로 팔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1650년, 대서양의 작은 해안 국가인 다호메이는 아프리카 내륙으로 국경을 확장했다. 반세기 후, 오세이 투투(Osei Tutu) 휘하의 아산테 제국은 여러 작은 왕국들을 강제로 연합하여 강력한 연방으로 만들었다. 전쟁 포로의 상당 부분이 노예로 팔렸다. 내륙으로 급습하는 동안 붙잡힌 다른 아프리카인들은 상품과 교환되었다.
7)

File
비록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의 탐욕이 노예 무역의 근본적 원인이었지만, 그 이전부터 포르투갈의 상인에게, 
스페인의 상인들에게 혹은 그 이후의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의 유력자들은 자신들의 이웃들을 팔아넘겼던 것이었다.

File

<세네갈의 유력자와 거래하는 프랑스인, 출처>

비단 베냉 지역의 다호메이 왕국뿐 아니라, 가나의 아샨티, 세네감비아로부터 상아해안, 곡물해안, 황금해안에
이르는 서아프리카 전역의 사람들이 유럽인의 비인간적인 노예 무역과 현지 지배자들의 탐욕으로 수 많은 노예가 되어
팔려나갔던 것이다.

File

가나 대학의 아카수아 페르비 연구원은 "동료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만들어 해안에 보내 밖으로 내보낸 것은 아프리카인 자신이었다"고 말했다. "It was the Africans themselves who were enslaving their fellow Africans, sending them to the coast to be shipped outside," says researcher Akosua Perbi of the University of Ghana." 9)
페르비는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모든 유럽의 노예상들이 노예를 포획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보통 왕이나 족장이나 부유한 상인들로부터 그것들을 샀다. 문제는, 왜 아프리카인들이 그들의 사람들을 팔았는가 하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도착하기 전 천년 동안 노예들은 보통 사하라 북쪽의 카라반들에 의해 팔리고 빼앗겼다. 가나 대학의 Irene Odotei는 "슬래버리가 아프리카에 존재했다"고 말한다. 많은 아프리카 문화권에서 노예제는 받아들여진 가정 관습이었지만, 다른 종류의 노예제도였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는 보통 권리, 법에 따른 보호, 사회적 이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집 주인들은 그들의 노예를 그들의 딸 혹은 아들이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Perbi는 말한다. "주인의 가족이나 가족 또는 혈통의 일부가 되었다."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에 대서양 노예 무역은 성장했고, 총과 교환하여 무역업자들에게 쉽게 팔릴 수 있는 죄수들을 데려갔다. "유럽이 도입한 노예 무역의 결정적인 요소는 총이었다."라고 오도테이는 말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이 자국민을 노예로 팔아넘겼을지 모르지만, 연구자들은 왕과 추장들이 바다 반대편에 있는 노예의 잔혹성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말한다. 만약 그들이, 만약,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노예 무역이 그렇게 거대하게 성장하거나,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말한다. 10)
그리고 그렇게 아메리카, 유럽으로 팔려간 노예들은 아프리카에서 겪던 노예생활과는 차원이 다른,
학대와 가혹행위, 비인간적 인권유린이 만연하던 목화 농장, 공장,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짐승과도 같은
대우를 받으며 지내게 된 것이다.
적어도 아프리카에선 절대 경험할 수 없었던 지옥과도 같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이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표1, 도표1)
https://slavevoyages.org/assessment/estimates, Emory University, Henry Louis Gates Jr., Slave Voyages: The Trans-Atlantic Slave Trade Database

2)
'Various forms of slavery were practiced in diverse ways in different communities of West Africa prior to European trade.'
Manning, Patrick (1983). "Contours of Slavery and Social Change in Africa". American Historical Review. p835–857.

3)
http://digitallibrary.usc.edu/cdm/ref/collection/p15799coll123/id/59647 Publisher (of the digital version):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Libraries

4)
Rodriguez Junius P. 세계 노예의 역사와 백과사전, 1편 , 1997. p. 53.

5)
Alexander Ives Bortolot (2003 년 10 월). "대서양 횡단 노예 무역"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6)
"In 1894, the last King of Dahomey, Béhanzin, surrendered his person to Alfred-Amédée Dodds Describing how he came in possession of the slaves, Captain William Foster wrote in his journal in 1860, "from thence I went to see the King of Dahomey. Having agreeably transacted affairs with the Prince we went to the warehouse where they had in confinement four thousand captives in a state of nudity from which they gave me liberty to select one hundred and twenty-five as mine offering to brand them for me, from which I preemptorily [sic] forbid; commenced taking on cargo of negroes [sic], successfully securing on board one hundred and ten."
"Season 4 Episode Guide  About Finding Your Roots". Public Broadcasting Service. 2018.
https://en.wikipedia.org/wiki/Dahomey 위키백과 다호메이 왕국

7)
'In 1650, for example, Dahomey, a small coastal state on the Atlantic, extended its borders into the interior of Africa. Half a century later, the Asante Empire under Osei Tutu forcibly united a number of small kingdoms into a strong federation. A large proportion of the prisoners of war were sold on as slaves. Other Africans captured during raids into the interior were exchanged for commodities.'
https://www.nationalarchives.gov.uk/pathways/blackhistory/africa_caribbean/africa_trade.htm 영국 국립기록보관소Walvin, J., Black Ivory: Slavery in the British Empire (2nd edn), London, 2001

8)
https://web.archive.org/web/20111201193105/http://www.histoire-afrique.org/article76.html?artsuite=5 Une histoire du Mali, YATTARA Elmouloud 및 DIALLO Boubacar Séga 바마코 대학교 역사고고학과

9), 10)
http://edition.cnn.com/WORLD/9510/ghana_slavery/ CNN, Researchers uncover Africans' part in slavery, 1995
가나 대학의 아카수아 페르비 연구원(researcher Akosua Perbi of the University of Ghana)

※본문과는 상관없는 후기
포르투갈에서 데려간 노예가 무려 580만여 명이라니.... 포르투갈......

ronaldo back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과연 'The No Show' 국...
한 때 팬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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